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생애 (문단 편집) === 외교정책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75_Ceausescus_Tokio_Hirohito.jpg|width=100%]]}}} || || [[히로히토]]와 차우셰스쿠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jsjrN5P.jpg|width=100%]]}}} || || [[지미 카터]]와 차우셰스쿠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Ceausescu.jpg|width=100%]]}}} || || 집권 초반기인 1965년, 중국의 덩샤오핑[* 당시에는 마오쩌둥이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1년 후 문화대혁명으로 덩샤오핑은 실각하게 된다.],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초청해 회담을 가진 모습. 1960년대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자 차우셰스쿠는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치며 최대한 중립을 지켰다.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xt8PZNSoKGc)]}}} || || 1978년 5월 20일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차우셰스쿠[* 1971년 6월 첫 평양 방문시 북한은 '[[친근하신 챠우쉐스꾸 동지의 노래]]'라는 노래까지 지어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본 영상 1분 15초에서 2분 55초 사이에서 등장한다. 여담으로 다른 배경 음악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0:34~1:15),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우상화 노래 <인민, 차우셰스쿠, 루마니아(Poporul, Ceauşescu, România)>(3:24~끝).] || >'''차우셰스쿠가 풍기는 분위기는 공산국가의 지도자라기보다는 남미의 군사 독재자 같았다.''' >---- >[[1987년]] [[10월]]에 차우셰스쿠가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차우셰스쿠를 관찰한 미 국무부의 중견 관리의 증언 막장이나 다름없는 국내 정책에도 냉전기 서방 세계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된 [[냉전]] 시기, 차우셰스쿠는 탈소련화 정책을 추진해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이나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비난하며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의 간섭에 저항하였고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함께 중립주의를 표방하며 서방에 화해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어필(공산권 국가 최초로 [[서독]]과 수교, GATT 가맹, EC 무역협정 조인)하는 공산권 지도자였다. 그외에도 자본주의 국가도 종종 방문했는데 [[일본]]이나 [[미국]]을 방문해서 그곳에서 [[쇼와 덴노|히로히토]]와 [[지미 카터]]를 만나기도 했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서방으로부터 대량의 자금이 유입되면서 루마니아는 경제적으로 (물론 짧은 기간이지만) 황금기를 누렸다.[* 1970년대 루마니아는 자가용차가 많이 보급되고 흔한 공산권 국가에서 보이는 물자부족현상도 별로 일어나지 않았으며 자영업도 꽤나 활성화되어서 일반적인 직장인들은 길거리 포장마차 같은 곳에서 점심이나 간식을 사먹고 그랬다고 한다. 그리고 2년에 한번씩 외국여행갈 수 있게 허용하기도 해서 여유만 있다면 해외여행도 갈 수 있고 그랬다고 한다. 물론 그게 사실은 외채를 잔뜩 빌려서 온 호황이라 문제였을 뿐이었다.] 물론 훗날엔 족쇄가 되었지만. 심지어 차우셰스쿠는 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소련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반군들을 비공식적으로 지지하기까지 했으며, [[이스라엘]]과 [[PLO]]를 동시에 인정하고 수교하였다. 심지어 공산권 국가들이 단체로 보이콧했던 19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 유고, 중국과 함께 루마니아를 대회에 참가시키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차우셰스쿠의 대외정책은 서방권에서 비교적 환영받았다. 아무리 국내적으로 막장이라고 해도 자기들 정책을 지지하고 빌린 돈도 잘 갚는데 안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차우셰스쿠의 이러한 탈소련화 정책은 우방국이었던 [[역린|소련을 격분하게 했고]] 그 결과 소련은 다른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에게도 판매하였던 [[Mi-24]] [[공격헬기]]나 [[Su-22]] 지상공격기 같은 무기들을 당시 루마니아에게 판매하지 않았다.[* 반면 옆나라인 헝가리와 불가리아에는 Mi-24와 Su-22를 제공했다.] 그러나 외교에서도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괴팍한 성격을 드러냈다. 상술했듯 암살을 우려한답시고 악수한 손을 면전에서 대놓고 소독하는 짓거리를 하고, 간단한 대화를 구사할 능력조차 없어서 공식 행사 자리에서도 굳은 자세로 일관했으며, 그 외에도 각종 해괴망측한 짓을 했기 때문에, 언제나 당사국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당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대부분의 국가 원수들에게 차우셰스쿠의 방문은 피할 수 없는 [[재난]]과도 같았다."'''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은 그런 지긋지긋한 일을 두 번 경험했다. 1978년 차우셰스쿠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였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국빈 방문 업무를 책임지고 있던 프랑스 관리들은 차우셰스쿠 일행이 떠난 뒤 해괴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차우셰스쿠가 머물렀던 영빈관 내의 모든 전깃줄과 전화선이 까뒤집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차우셰스쿠의 경호원들이 도청장치가 있는지 확인했던 것이다. 여기까지면 그나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들은 영빈관에서 간단히 가져갈 수 있는 [[시계]], 재떨이, 공예품들을 모조리 훔쳐갔다. 외교를 하러 국빈방문해서 도둑질을 하는 지도자는 아마도 차우셰스쿠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은 이후 루마니아 사절단의 방문 일정이 잡혀있던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에게 차우셰스쿠 일행의 [[도벽]]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 당시 엘리자베스 2세는 차우셰스쿠가 '좋은 공산주의자'라는 내각의 주장에 따라 차우셰스쿠를 버킹엄 궁전으로 초대한 상태였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버킹엄 궁전]]의 관리인들에게 루마니아 사람들의 행동을 잘 감시하라는 주의를 주어 좀도둑질의 피해를 최소화시켰다. 여왕은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이 차우셰스쿠가 버킹엄 궁에도 도청장치가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아연실색했다. 사석에서 그를 '저 끔찍한 난쟁이(that frightful little man)'라고 불렀던 여왕은 차우셰스쿠가 도청장치를 두려워하여 버킹엄 궁 안의 잔디밭에서 아침 일찍 수행원들과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고는 황당해했다고 한다. 위의 엽기적인 행동 항목에 나오듯이 여왕과 악수한 뒤 그 자리에서 손을 소독하는 무례를 저지르기도 했다. 차우셰스쿠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했던 여왕은 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맞은편에서 휘적휘적 걸어오는 차우셰스쿠를 보고 의례적인 아침 인사조차 건내기도 싫어서 덤불 밑에 숨어서 차우셰스쿠가 지나가길 기다릴 정도였다. 게다가 버킹엄 궁전에서의 만찬에는 차우셰스쿠의 부하들이 검사한 음식들만 상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차우셰스쿠는 헝가리를 강하게 비난하며 영국 귀족원에 속한 헝가리 귀족을 쫒아내라는 주장까지 했다. 문제는, 이게 내정간섭인 것은 둘째치고 '''엘리자베스 2세 본인'''을 건드린 셈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본인에게도 멀게나마 헝가리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의 친할머니인 [[테크의 메리|메리 왕대비]]는 조상 중에 헝가리 귀족[* 메리의 친할머니 클라우디아는 헝가리 귀족 출신이다.]이 있었고, 엘리자베스도 자신이 헝가리와 연관이 있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가 이런 식으로 나왔으니 기분이 크게 나빠진 건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개인적으로도 여왕과 차우셰스쿠는 악연이 있었는데 여왕은 루마니아 공산당이 엘리자베스 2세의 친척인 미하이 1세를 축출한 것은 물론, 그가 엘리자베스 2세와 에든버러 공의 결혼식에 참석한 틈을 타서 퇴위와 왕당파 숙청을 자행했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감추지 못했다. 덕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차우셰스쿠가 영국에 있는 동안은 마지못해서 "귀하의 세계적인 명망과 경륜은 물론 영향력까지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라고 외교적인 수사로 칭찬하며 바스 훈장(Order of the Bath)을 수여했지만 차우셰스쿠가 귀국하자마자 '''수상 제임스 캘러헌과 외무장관 오언을 호출하여 어떻게 초대해도 저 따위 인간을 초대할 생각을 할 수 있었냐고 매우 강하게 질책했다.''' 이는 2022년 9월에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녀에게 있어서는 전무후무할 정도의 분노 표출이자 수상과 장관 문책이었는데, 즉위 직후부터 가급적이면 총리와 내각의 정책에 대해 언급을 사양하며 선대의 실책 상쇄를 목적으로[* 당장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는 입헌군주제임에도 열혈 나치당원 수준으로 대독외교에 노골적으로 간섭해서 나라를 히틀러에게 갖다 바칠 뻔했다.] 정치적 행보를 최소화했던 엘리자베스 2세가 이처럼 총리에게 화낸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고 한다. 물론 1989년 차우셰스쿠가 몰락하자 영국 왕실은 차우셰스쿠에게 수여했던 바스 훈장을 박탈했는데, 이때 영국의 의원들은 '차우셰스쿠와 같은 인간에게 훈장을 줘서 영국의 왕실과 작위 제도가 불신을 받게 되었다'며 '''그런 자에게는 학살 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비꼬았다고 한다. 참고로 2023년 현재까지도 영국 왕실이 훈장을 박탈해버린 사례는 차우셰스쿠를 제외하곤 [[로버트 무가베]](2008)가 유일하다. 어쨌든 줬다 뺐는 모양새도 웃겼기 때문에 영국 왕실은 이때 상당히 체면을 구겼다. 풍자잡지 프라이빗 아이(Private Eye) 1990년 1월호는 차우셰스쿠의 영국 방문을 풍자한 합성짤을 내놓았는데, 에든버러 공이 엘레나 차우셰스쿠에게 "대통령님의 취미는 어떻게 되십니까?"라고 묻자, 엘레나는 자랑스럽게 "대량학살이요."라고 대답했고, 옆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오, 흥미롭네요."라고 대답한다.(...) [[파일:732_big.jpg]] 여담으로 위의 헝가리 문제에 대해 영국 왕실에서는 환영 만찬 자리에 '클라우디아'[* 앞서 말한 엘리자베스의 헝가리 조상의 이름이다.]라는 이름의 음식을 올려서 복수했으나,[* 영국 왕실은 외국 국빈의 이름이나 관련 있는 것을 딴 특별식을 대접하곤 했는데, 이란의 샤 [[팔라비 2세]]가 방문했을 때는 테헤란의 이름을 붙인 음식 ‘Aiguilette de Sole Tehran'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방문했을땐 그의 왕비인 [[루이즈 마운트배튼]]의 이름을 탄 음식 ‘Soufflé Glacé Louise’를 대접했다. 근데 차우셰스쿠가 왔을 땐 그에게 헌정하는 음식은커녕 대놓고 그를 엿먹이는 음식을 내준 것이다. 그외에 여왕은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이나 독일 대통령 [[테오도어 호이스]]에겐 최고급 와인을 내주었으나 차우셰스쿠에겐 싸구려 와인만 내놓았다.] 정작 차우셰스쿠는 무식한 탓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친서방 외교는 차우셰스쿠에게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왔는데 오일쇼크 이후 서방에 진 부채로 고생한 것은 물론이고, 서방에서 루마니아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방이 달러 내주는 돼지저금통이 아니라 자기를 엿먹일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차우셰스쿠는 80년대부터 친소련으로 전환하여 1981년 폴란드 무력개입을 주장하는 등 강성 바르샤바 조약기구 지지자로 돌아섰고, 1989년에도 소련의 지원을 얻어서 생존하려고 발악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